제   목 :[삼손]요약
작성자 :예수짱  2008-04-03 11:19:02

삼손
옥성석 지음
국제제자훈련원 / 2006년 10월 10일 / 197쪽 / 8,000원


▣ 저자 옥성석
저자 옥성석 목사는 고신대학교 신학과(B.A)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을 거쳐 미국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A ministry strategy in the declining area of the city’ 논문으로 목회학박사(D.Min)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객원교수, 총신대학교 운영이사, 하이패밀리 이사, 조선족선교회 이사, 아가페선교회 이사, 일산기독교연합 회장, 교회갱신협의회 부회장, 한국목회자 미래포럼 부회장, 기독교 TV 교양본부장, 기독신문 논설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1989년부터 충정교회(고양시 일산 소재)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 야곱』(국제제자훈련원)이 있다.

▣ Short Summary
저자의 인물 강해 시리즈, 제2권이다. 우리가 흔히 델릴라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만으로 '실패자'라고만 여기는 삼손에 대한 평가가 왜곡되었음을 강조하면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에 의해 믿음의 조상이 된 삼손을 '성공자'로 여겨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삼손의 모습을 통해 '실패'와 '승리'의 성경적 의미를 알려줌으로써, 우리의 생각을 확장하는 계기를 선사한다. 아울러 유혹이 가득한 삶에서 치열한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남성들에게 위안과 격려, 그리고 승리의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 차례
1장 삼손의 복음서
2장 삼손만 같아라
3장 일곱 번의 고비, 이것을 넘어라
4장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면
5장 나귀 턱뼈의 노래
6장 들릴라의 무릎
7장 잘린 머리털, 그 이후
8장 ‘어처구니’는 있다
9장 삼손의 세레모니
10장 삼손을 만났습니다
11장 축복의 관(管)을 소제하라
12장 ‘이미’와 ‘아직’사이에서



1장 삼손의 복음서

사사기 13장을 보자.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삼손이다. 성경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을 보면 삼손은 결코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뜻 가운데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레위기 6장을 보면 ‘나실인’은 세상 사람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자’를 말한다. 그래서 저들은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았고, 머리도 깎지 않았으며, 또 시체나 그 밖의 부정한 것도 만지지 않았다. 삼손이 살았던 사사 시대는 죄악과 혼돈의 시대, 즉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져 버린 때였다. 법도 양심도 없었다. 모두가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나실인’, 즉 저들과는 다른 구별된 삶을 살도록 택함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 바로 삼손이다. 이렇게 볼 때 ‘나실인 삼손’은 하나님의 영적인 자녀로 거듭난 우리 모두의 ‘그림자’라 할 것이다.

삼손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셨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감동하셨고 성령이 그와 함께하셨다. 삼손의 엄청난 힘의 근원은 하나님의 영, 즉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그 순간, 우리는 ‘가장 강한 사람’ 바로 삼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삼손의 스토리는 의외로 실패와 상처투성이의 인생 이야기다. 넘어지고 흔들리는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들릴라라는 여인의 무릎에 누워 머리가 빡빡 깎기는 삼손, 그래서 원수들에게 붙잡혀 눈까지 뽑힌 뒤 비참하게 짐승처럼 맷돌을 갈고 있는 모습. 이런 스토리들로 인해, 삼손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은 대단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지금까지의 선입견을 잠시 유보하고, 성경이 삼손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살펴보자. 아니,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주목해 봐야 한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믿음의 반열에 삼손이 당당히 언급되고 있다. 기드온, 다윗, 사무엘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 그를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삼손을 예외로 취급하고 있지 않다. 기이한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의 약점들을 언급하지도 않으며 더 나아가 삼손이 여타 다른 믿음의 조상들보다 부족하다는 뉘앙스도 전혀 풍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선한 충격이다. 따라서 우리도 지금까지의 삼손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삼손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왜 하필이면 삼손을 믿음의 반열에 올려놓으셨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삼손 스토리를 통해서 성령께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는지 발견해야 한다.

나실인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복을 받은 그가, 한때 성령에 충만했던 그가, 힘이 최고였던 그가 아무런 실패 없이 완벽하게 성공한 영웅의 삶을 살았다면 이 삼손 스토리는 오늘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삶과는 그 어떤 접촉점도 없기에 감동도, 도전도, 용기도 주지 못할 것이다. 삼손은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실패자까지도 용서해 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덮어 주시고, 그의 부르짖는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삼손 스토리의 마지막은 놀라운 회복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구약의 복음서, 아니 삼손의 복음서라고 부르고 싶다. 이처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풍성히 나타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성경을 펼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경 속의 사람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사람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완벽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 힘이 센 영웅들의 이야기도 아니다. 성경은 실패하여 쓰러진 사람들이 다시 일어서고, 회복되어지는 이야기이다. 즉 실패한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삼손에게서 꼭 하나 배워야 할 것이 있다. 실패했다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자세이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성전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부여잡고 기도했다. 실패할 때에 영적 도해를 잘해야 한다. 지금 당신 안에 약점, 한계, 아픔이 있는가? 하지만 그 속에 성령께서도 함께하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분은 가장 강하신 분이다. 삼손 드라마는 결국 누가 이겼느냐의 이야기다. 최후의 승리자는 하나님이 함께하신 삼손이었다. 그가 강할 때, 그래서 자신의 힘을 의지할 때 그는 어이없이 실패했으나, 실패한 이후의 삶에서 자신의 실패와 약함으로 지금까지의 그 실패를 일거에 만회하게 된다.

미래의 경영자들에게 있어서도 실패보다 더 중요한 자산은 없다. 경영 사상가인 톰 피터스의 ‘실패 예찬론’에 따르면 “우리에겐 훨씬 더 많은 실패와 보다 빠른 실패가 필요하다. 우리가 국민 총 실패율을 높일 수 없다면 우리는 매우 어려운 상태에 처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실제로 경제의 가장 밝은 지표는 실패의 증가다. 오늘과 같은 변화와 혁신의 시대에는 실패율을 높이는 것, 즉 보다 많은 실패를 보다 빠르게 하는 것이 결국 성공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2장 삼손만 같아라

사사기 14장은 삼손의 부도덕한 행동들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있다. 첫째, 그는 이방 나라, 그것도 원수 나라인 블레셋의 한 여자를 위해 아내로 삼으려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특히 나실인으로서는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다. 둘째, 부모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다. 셋째, 블레셋 아내의 강권에 못 이겨 자기가 낸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줘 버린다. 넷째, 아스글론이라는 곳에 내려가 그곳 사람들 삼십 명을 쳐 죽였다. 다섯 째, 수수께끼 게임으로 화가 났기 때문인지 갓 결혼한 아내를 버려두므로, 그의 장인이 삼손 아내를 삼손의 친구에게 줘 버리는 실수를 하게 만든다. 한때 삼손의 아내였던 이 여인은 삼손을 얼마나 원망하며 살았겠는가. 이 모든 행동이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반된 행동들이다.

그러나 지금 다루려는 주제는 ‘삼손만 같아라’이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무대 위의 사람 혹은 그 사건이 아니라 그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사건 뒤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모든 것을 컨트롤하시는 분이 계시다. 그 분을 보며 그분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삼손이 한 행동들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요는 표면 위에 나타난 일련의 행동을 도덕적인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혼에 관련하여 삼손은 부모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뜻을 꺾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한다. 그런데 이런 삼손의 행동 뒤에는 누구의 뜻과 의지가 작용하고 있었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는가?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삿 14:4).

사사 시대의 특징은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다 자신들의 기분, 즉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자가 있다. 누구인가? 바로 삼손이다. 삼손은 하나님의 뜻, 그분의 의지를 좇았다. 더 나아가, 그는 부모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를 더 높이 두고 행동하고 있다. 자기 안에 끊임없이 역사하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나를 낳아 주신 내 부모의 권위보다 더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문맥을 통해서 그가 블레셋 여자를 뜨겁게 사랑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결혼을 빌미로 블레셋을 징벌하시려는 하나님의 뜻, 그 권위 앞에 삼손은 순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삼손만 같아라’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내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감동하심에 순복하는 삼손을 본받아야 한다. 진정 삼손만 같아라.

3장 일곱 번의 고비, 이것을 넘어라

‘블레셋’이 어떤 민족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삼손 스토리가 주는 영적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블레셋은 ‘촌에 거하는 자’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이란 말도 블레셋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들의 원래 고향은 지중해 그레데 섬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지중해 섬에서 빠져나와 애굽을 침략하려다 실패하고(람세스 3세, B.C.1205-1174), 돌아오는 길에 욥바를 중심으로 한 해변에 정착하여 이스라엘 땅을 넘보는 이스라엘 민족 최대의 숙적이 된다. 그러다 이 블레셋이 삼손 시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후 무려 4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지배를 받는다. 저들은 이후에도 사무엘 시대, 사울 왕 시대를 거쳐 다윗 시대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이스라엘을 괴롭힌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블레셋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의 대적자, 즉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민족으로 묘사되고 있다.

삼손이 결혼하려는 여인은 바로 이 블레셋 족속의 딸이었다. 이에 반해 삼손은 어떤 사람인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사다. 사사란 왕, 제사장, 선지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삼손과의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결혼이 있은 후에 수수께끼 사건이 일어난다. 물론 그것도 삼손이 블레셋을 공격할 빌미를 위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수수께끼를 7일째가 되어도 풀지 못하자 블레셋인들이 삼손의 아내를 찾아온다. 그리고 그녀에게 온갖 협박과 회유를 가한다. 결국 삼손의 아내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항복하고 만다. 삼손에게 떼를 써 수수께끼의 해답을 기어이 알아내 원수들에게 넘겨 주는 우를 범하고 만다. 그 결과, 그 여인은 어떻게 되었는가? 삼손의 친구에게 준 바 되고, 결국 나중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살랐다.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조금만 더 견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성경에서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이나 ‘다 됐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성경 잠언에서는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라고 말한다. 당신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웅덩이에 빠져 있는가?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라. 그분이 넉넉히 피할 길을 주실 것이다. 우리의 시험은 ‘일곱째 날’의 시험이다. 조금만 참으면 끝날 시험이요, 그 날이면 해결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당하지 않는다.

이 과정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옛 주인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주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2, 13)라고 말씀한다.

4장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면

수수께끼 사건으로 속상했던 삼손은 아내를 버려둔 채 집을 나갔다가 얼마 후 다시 아내를 찾아온다. 그런데 그 사이 장인이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줘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삼손은 불같이 화가 난다. 그래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 그 꼬리와 꼬리를 묶고, 묶은 부분에 홰를 달아 불을 붙여 원수들의 논밭에 풀어 버린다. 꼬리에 불이 붙어 미쳐 날뛰는 여우들에 의해 밀농사는 다 엉망이 된다. 이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로 쳐들어오게 되었고, 삼손은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쳐 죽인다. 삼손의 충동적이며 돌출적인 행동이 극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삿 15:14). 여기,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라는 말씀을 다른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영의 권능이 세차게 덮치매”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영으로 삼손과 함께하셨다는 뜻이다. 삼손의 이해할 수 없는 돌출적 행동을 하나님께서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삼손의 행동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지금 삼손을 신뢰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어떤 모습을 귀하게 보신 것일까? 우리는 우선 이 사건과 관련하여 블레셋이란 나라가 등장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블레셋은 영적으로 어둠의 세력, 하나님 백성의 원구, 곧 사탄의 권세를 뜻한다. 그런데 바로 이 블레셋을 대하는 태도에서 삼손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패배주의와 현실 안주적인 사고를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 전체가 이런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눈여겨 보라. 이렇게 무서워 떨게 만드는 블레셋 군사의 수는 겨우 1,000명이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은 무려 3,000명이나 된다. 그런데 저들을 대항하여 싸울 생각은 안 하고, 오히려 블레셋을 대항하고 있는 삼손을 잡아 묶어서 마치 조공을 드리듯 저들에게 넘겨주기까지 하고 있다. 블레셋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의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손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모두가 포기하려 할 때 그는 혈혈단신으로 블레셋과 대적한다. 당당히 맞서고 있다. 3,000명이나 되는 주변사람들이 토해 내는 부정적인 성토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붙잡혀 꽁꽁 묶인 상황에서도 결코 주눅 들지 않고, 혼자 무려 1,000명의 원수들과 싸우기 위해 용감하게 일어난다. 삼손의 바로 이 모습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셨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기 위해 ‘여호와의 영’으로 임하신 것이다. 삼손의 이러한 태도는 마치 골리앗 앞에서의 다윗과 같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한 것은 언제였는가?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라고 했는데 여기서 레히는 블레셋 사람이 진을 치고 있는 장소이다. 포승줄에 묶인 몸이지만 저들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고 있는 바로 그때, 그 위기의 순간,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했다. 그리고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킨다. 그래서 믿음의 한 발자국이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앞에 섰을 때 제사장들이 한 발자국을 강물을 향해 내딛는 순간 강물이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났다. 풍랑이 요동치는 바다 위로 베드로가 ‘한 발자국’ 내딛었을 때,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맛보았다. 열 명의 문둥병 환자들이 믿음으로 몸을 돌이켰을 때 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했다. 한 발자국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두 가지 복을 받는다. 첫째, 결박이 풀어지는 은혜이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면 당신을 얽어매고 있는 그 줄이 어떤 줄이든지 마치 불탄 삼과 같이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가난이라는 굴레, 병이라는 굴레, 패배자라는 굴레가 다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둘째, 그동안 못 보았던 것을 보게 된다. ‘나귀의 턱뼈’는 쓸모없는, 가치 없는, 버려진 그 어떤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평소에 눈길도 주지 않고 관심도 없이 지나쳐 버리는 그런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순간, 영안이 밝아진 삼손은 하나님의 자녀가 봐야 할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효과 있게 활용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약속하신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8, 29).

5장 나귀 턱뼈의 노래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삼손의 이 시를 평가절하해 버린다. 마크 애터베리의 『삼손 신드롬』이란 책은 ‘왜 강한 남자들이 실패하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의 짧은 단가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감사의 말 한마디도 없다. 그 대신, 모든 영광을 자신이 취한다. 역겹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혹자가 말하는 것처럼 삼손의 시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는 그런 내용의 시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삼손의 시와 흡사한 시가 성경에 등장한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지은 시이다.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창 21:7). 사라의 노래에서도 ‘하나님’이란 단어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도 사라가 자신을 과시하거나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삼손에게도 같은 평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18절을 보면 삼손이 어떤 마음 상태로 이 노래를 부르는지 알 수 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니” 삼손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으스대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이 큰 구원을 베푸셨고, 나는 단지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라고 고백한다. 이런 삼손의 처절한 외침은 바울 사도의 고백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며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또한 삼손의 태도에서 우리가 도전받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가 단지 ‘입술’로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독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삼손의 액션 하나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삿 15:17). 삼손에게 있어 나귀 턱뼈는 자신의 생명을 지켜 준 매우 의미 있는 것이다. 면류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손은 자신에게 승리를 안겨다 준 자랑스러운 나귀 턱뼈를 던져 버린다. 왜일까?

이것은 계시록에 나타난 이십사 장로들이 면류관을 드리는 행동과 흡사하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0, 11). 면류관을 드리는 이들의 행동에는 “이 땅에 살면서 내가 땀 흘리고, 수고하고, 애를 쓴 결과 이 면류관을 쓰게 되었다. 이 면류관은 나에게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이 면류관을 쓰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드린다”는 뜻이 담겨 있다. 삼손이 나귀 뼈를 던지는 것도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의지적 표현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히 11:32). 진정으로 믿음의 반열에 서기를 원한다면 나의 ‘나귀 턱뼈’를 던져 버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던질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욥 22:24, 25).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니”(전 11:1).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3-5).

6장 들릴라의 무릎

다음의 내용은 삼손 이야기 가운데 가장 슬픈 부분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삿 16:21). 옥에서 짐승처럼 맷돌을 돌리며 원수들의 비웃음을 온몸에 받고 있는 삼손은 그야말로 수치의 절정이다. 그러나 삼손의 이 처량한 모습 때문에 ‘가장 슬픈 부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20절에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는 말씀 때문이다. 이보다 더 슬픈 구절이 있을까? 슬프다는 표현은 너무 약하다. 오히려 섬뜩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어떻게 해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떠나 버렸을까? 천하의 삼손이 왜 이 지경이 되어 버렸을까? 본문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삼손이 가사에 가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삿 16:1). 가사라는 지명으로 보아 삼손이 블레셋의 제일 밑에 있는 동네까지 내려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적진을 관통해서 활보하며 걸어가도 어느 누구도 삼손의 가는 길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삼손은 심히 교만해졌다. 마치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 승리를 쟁취했다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러한 삼손 앞에 사탄은 ‘들릴라의 무릎’이라는 덫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삼손의 시선이 잘못된 곳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다고 했다. 언제나 보는 것이 문제다. ‘본다’는 것은 곧 관심을 갖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범죄가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한다. 삼손은 영적으로 둔감해져 달콤한 가면을 쓴 들릴라의 무릎에 누워서도 아무 일이 없을 거라고 자만했을 것이다. 예전에 요셉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으나 그의 처신은 삼손과 달랐다.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쳤던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시선을 고정시켜야 할 곳은 오직 한 곳뿐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 한 분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는 자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낙심하지 않는다. 넘어지지 않는다. 사탄의 유혹에 끌려가지도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삼손의 실패와 관련하여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삼손, 그가 언제나 혼자였다는 사실이다. 그와 함께한 친구를 찾아볼 수 없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성경은 사탄이 삼킬 자를 찾아 울부짖으며 두루 다닌다고 말씀한다. 여기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은 복수인 ‘삼킬 자들’이 아니라 단수인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하는 점이다. 에덴동산에서의 사탄도 부부가 함께 있을 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어찌된 것인지 모르지만 아담과 하와가 각각 홀로 있을 때 접근했다. 폴 트루니에는 “사람이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결혼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지금, 모든 일이 이상하게 잘 풀려 가고 있는가? 기도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가? 그래서 자신만만한가? ‘들릴라의 무릎’이 코앞에 놓여 있다. 자신의 자제력을 믿고 있는가? 몇 번 이런 저런 일들을 행하고, 이곳 저곳에 가도 아무 탈이 없는가? ‘들릴라의 무릎’ 앞에 거의 다다랐다. 주변에 믿음의 친구가 없는가? 아니, 진심으로 깊은 대화를 나눌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들릴라의 무릎’에 지금 누워 있는 것이다.

7장 잘린 머리털, 그 이후

실수는 한순간이다. 그러나 실족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진행되어 왔고 또 반복되어 왔던 것이다. 한순간의 실수였노라 강변하지만 사실은 오래 품은 욕망의 불가피한 결과이다. 이미 그전에 수없이 그것을 좇고 그 자리에 멈춰 서고, 그와 같은 자리에 참석해 자주 앉고 급기야 침대에 누운 결과라는 말이다. 들릴라의 무릎에서 깊은 잠에 빠져 영적 혼수상태에 있던 삼손, 여호와의 영이 떠난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영적으로 둔감해져 있던 삼손, 그가 이렇게 잠든 사이, 원수는 머리를 빡빡 밀어 버렸고, 두 눈을 빼 버렸으며, 놋줄로 묶고 감옥에 쳐 넣어 맷돌을 돌리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삼손은 끝났는가? 그가 이제 더 이상 소망과 꿈을 가질 수 없는 비참한 상황에 던져졌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15장에서 마무리하지 않고 16장으로 펜을 넘기게 하신 것일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을 염두에 두셨다. 22절의 말씀을 주목하라.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삿 16:22). 바로 이 한 줄의 말씀을 위해 성령께서는 저자의 마음을 움직여 16장을 기록하도록 하셨다. 사실, 이 말씀만큼 오늘 우리에게 위로와 큰 힘이 되는 말씀도 없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삼손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잘려 나간 머리로 시선을 돌린다. 나실인이었던 삼손의 존재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머리칼이 다시 자라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마라. 머리칼이 자라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계신다. 머리칼이 다시 자라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직 그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신다. 한 번 택한 백성을 절대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삼손을 다시 쓰기 시작하셨다.

한편 암울한 사사 시대에 한 아이가 자라고 있다. 사무엘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사무엘은 곧 희망이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자란다는 것은 희망의 시대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사무엘이 점점 자라고 있기 때문에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400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이 사라졌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캄캄했던 시대에 자라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바로 예수님이다. ‘아기 예수’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하면 안 된다.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8장 어처구니는 있다

우리는 한심한 일을 만났을 때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을 사용한다. 삼손은 실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상태이다. 그는 스스로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 어처구니를 붙잡고 돌렸다. 맷돌의 손잡이가 바로 ‘어처구니’였던 것이다. 삼손은 맷돌을 수없이 돌리고 또 돌렸다. 어찌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는 그 일을 반복했다. 그런데 맷돌을 돌리는 과정에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이제 그는 깨어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맷돌을 돌리는 것이 삼손에게 있어서는 그를 깨어 있게 하는 영적 방편, 즉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육의 눈은 감겼지만 영의 눈은 환히 떠서 하늘 영광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맷돌을 돌리는 것은 삼손을 더 이상 누워 있을 수 없게 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들릴라의 무릎에 누워 있던 삼손을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영적 방편, 그분의 섭리였다. 죄악의 자리에 던져졌던 그에게 회복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이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을 좇는 것이다. 이전에 삼손은 들릴라라는 여인을 좇아다녔으나, 이제 그는 하나님을 좇고 있다.

삼손은 이때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된다. 조그마한 손잡이에 의해 그 무겁고 큰 맷돌이 스르르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맷돌에 있어서 ‘어처구니’가 그렇게 중요한 줄 미처 몰랐다. 만일 어처구니가 없다면 맷돌은 한 바퀴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어처구니를 돌리며 깨달은 것이다. 그러다 드디어 때가 왔다. 블레셋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다곤 신전에 모였고, 감옥에서 삼손을 끌어냈다. 천하를 호령하던 삼손을 괴롭히고 조롱하기 위해서이다. 저들은 눈 빠진 삼손을 신전의 두 기둥 사이에 세웠다.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나 촉각은 그 누구보다 예민했을 것이다. 기둥을 만지는 순간, 삼손의 뇌리에는 자신이 지금까지 수없이 붙잡고, 또 붙잡았던 ‘어처구니’가 떠올랐다.

“아, 감옥에서 그 무거운 맷돌을 쉽게 돌릴 수 있었던 것은 어처구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큰 집에도 어처구니, 즉 이 집을 떠받치고 있는 큰 기둥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런 영의 음성이 들렸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즉각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부탁한다.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 즉 어처구니를 붙잡을 수 있도록 해 달라.”

믿음의 사람은 삼손과 같은 사람이다. 비록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무엇보다도 지금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이다. 이제부터는 ‘어처구니’를 붙잡고 맷돌을 돌리면 된다. 붙잡고 돌릴 ‘어처구니’가 있음에 감사하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 기둥을 붙잡게 해 주실 그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9장 삼손의 세레모니

삼손의 승리는 그가 한손으로 머리를 만지며, 또 한손으로 맷돌을 돌리고 있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고 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삼손의 ‘세레모니’라고 부르고 싶다. 승리자가 취하는 포즈이기 때문이다. 그만의 특이한 ‘믿음의 세레모니’를 통해 그는 다곤 신전, 그 현장에서도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생각하고 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삿 16:28). 여기서 눈길을 끄는 한 문장이 있다. 바로 “나를 생각하소서”이다. 다른 사람이 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믿음의 세레모니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한 삼손은 결정적인 순간에 입술로 부르짖는다.

그의 기도는 이루어졌다. 이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생각하셨다는 뜻이다.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삿 16:30).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기만 하면, 하나님도 나를 생각해 주신다. 하나님이 한 번만 생각해 주시면 역사가 일어난다’는 교훈을 준다. 그렇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눈 빠진 삼손, 힘 빠진 삼손, 이미 초라할 대로 초라하게 되어 원수들의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 버린 삼손을 하나님께서 한번 생각해 주시니까 대역전극이 일어났다. 하나님이 한번 그를 생각하시니, 최후의 순간에 기적을 맛볼 수 있었다.

내 앞에 어떤 일이 가로놓여 있다 할지라도 미리 염려하지 마라.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나만의 세레모니, 믿음의 세레모니를 만들어 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 세레모니를 하나님 앞에 펼쳐 보여 드리라. 하나님은 분명히 그 믿음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다. 힘들 때마다 돌려야 할 맷돌을 돌리며 머리를 매만졌던 삼손을 떠올리라. 옥문이 열리고, 기둥을 붙잡고 서는 그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삼손을 연상하라. 당신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승리의 세레모니를 자랑스럽게 펼쳐 보이는 주인공이 될 것이다.

10장 삼손을 만났습니다

얼마 전 사역자들이 영적 재무장을 위해 영성수련회에 참석했다. 전국에서 천여 명의 목회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모처럼 강단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 내 자신의 영적 상태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내 영적 상태, 그것은 메마름과 간절함이었다. ‘아, 이렇게 메말라 비틀어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구나! 능력까지 상실한 마른 뼈와 같은 앙상한 모습이었구나!’ 성령께서는 이런 나에게 말씀 두 군데를 펼쳐 보이셨다. 그리고 이 말씀들을 계속해서 묵상하게 하셨다. 그 첫 번째 말씀은 시편 139편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아신다’ 이 단어가 내 가슴을 후벼 파기 시작했다. 내 귀에 확성기를 들이대고 말하는 것처럼 꽝꽝 울리기 시작했다.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말이다. 두 번째 주신 말씀은 사사기 13장이었다. 펴 보니, 놀랍게도 삼손에 관한 기사였다. 너무 의외여서 주님께 물었다. ‘주님, 이 부분은 잘 아는 말씀이에요. 설교도 끝냈어요.’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나도 안다. 그러나 다시 봐라. 다시 묵상해라. 다시 전해라. 다시 더 크게 외쳐라!’ 나는 성령의 압도하심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칩거하다시피하면서 시편 139편과 특히 사사기 13-16장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3천 년 전 인물인 삼손이 꿈틀거리며 일어나 내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그날 밤 삼손을 보았고 그를 만났다.

그날 밤 내가 만난 삼손은 내 자신이며, 또한 한국 교회였다.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하나하나의 영적 상태였다. 우리의 자화상이었다. 아니, 나의 자화상이었다. 나는 하나님이 떠나시려고 얼굴을 돌리시는 모습, 은혜의 손을 거두시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을 보았다. 전기에 감전된 듯한 영적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영적 통증이 전달되어 오기 시작했다.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상처투성이의 모습, 죄악 된 나의 모습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11장 축복의 관을 소제하라

사람은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있다.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아킬레스건이 있다. 천하의 삼손, 그의 아킬레스건은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에게는 기도가 없었다. 기도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적어도 다곤 신전의 기둥을 붙잡을 때까지는 말이다. 그는 사사로만 무려 20년을 사역한 사람인데,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를 찾아오셨고, 그를 축복하셨으나 그는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부모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인지, 사역이 너무 바빠서인지, 자신이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잘 풀렸기 때문인지 어쨌든 그는 기도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 동안 하나님과 영적 교제, 영적 호흡을 하지 않다 보니 기도의 관, 축복의 관이 점점 막히기 시작했다.
이 시간,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보라. 혹시 기도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지는 않은가? 어쩌다가 기도를 하긴 하지만 그 길이가 짧아지고 있지는 않은가? 짧아질 뿐만 아니라 기도의 깊이 즉 진정성, 간절함이 결여되어 있지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나도 모르게 축복의 관이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기도를 회복하라. 지금도 늦지 않았다. 기도하면 축복의 관이 소제되고, 영적 눈이 밝아지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12장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문제는 영적 눈이다. 우리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삼손, 그는 육신의 눈은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나 그의 영적 눈은 예전과 다르게 환히 열렸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축복의 열쇠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삼손을 도울 소년을 가까이 두셨다. 또한 신전을 버티고 있는 기둥도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멀리 떠나셨던 하나님이 이제 삼손 곁에 다시 찾아오셨다. 삼손 안에 찾아오셔서 친히 역사하신 것이다. ‘이미’가 아니라 ‘아직’을 붙잡는 믿음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문제 해결의 열쇠를 가까이 두신다. 지금 당신의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가까이에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한 ‘환경’도 가까이에 있다. 또 문제를 능히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도 가까이 계신다.

바울 사도가 자신을 ‘두 사이에’ 끼어 있는 존재(고후 5:8)라고 고백했듯이 지금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다. 악한 사탄은 나를 ‘이미’ 쪽으로 계속 끌어가려고 한다. 이젠 포기하라고, 그만하라고 한다. 이젠 끝났다고 속삭인다. 하나님이 너를 떠났다고 속삭인다. 모든 것이 그런 것만 같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아직’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아직’을 향하여 시선을 고정시키고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믿음이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해결의 열쇠를 가까이 놓아두신다. 뿐만 아니라 그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 영적 지혜까지 허락해 주신다.

지금 당신은 어떤 상황 속에 놓여 있는가? 삼손과 같은 상황인가? 아니, 머리칼이 잘리고 눈이 뽑힌 후 깊은 감옥에 던져진 삼손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인가? 그래도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아직’을 선택할 수 있다면 소망이 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삼손, 그는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린 사람이었다. 삼손, 그는 분명 실패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반열’에 당당히 세우셨다. 그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아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히 11:32)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가족과 일과 신앙의 조화]요약
[비전을 전파하라 - 신념의 CEO 링컨]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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